첫 눈 내린날 창덕궁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이며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고한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으며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한다.
이제 부터 여행경로를 따라 창덕궁을 둘러봤다.
첫 눈위로 단풍잎이 수북히 쌓인 풍경 저 앞으로 안쪽에서 본 돈화문이 멋지다.
돈화문으로 들어와 작은 진선문 석교를 지나 진선문을 통과하면
저 앞으로는 숙장문이 있고 좌측에 인정문을 볼 수가 있다.
진선문은 태종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라고한다.
우측으로는 길게 이어진 기둥과 지붕의 처마에 현판들이 걸려있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저 앞 숙장문으로 가면 낙선재와 창덕궁 후원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인정전에도 경복궁과 같이 품계석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동쪽에는 문관이 서고 좌측에는 무관들의 자리인데
하늘이 열려서 비가 오거나 할때 처음엔 제대로 서 있다가
한 바탕 비나 눈을 피하고 나서 자리잡으려고 우왕좌왕 정신없이 서다보면
두서가 없어져서 품계석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세자나 대군은 무인들의 줄의 맨 앞 단상에 섰다고 한다.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며,
조선시대 내내 양궐 체제하에서의 실질적인 두 법궁의 지위를 유지한 유일한 궁궐이다.
또한 가장 오랜 기간 조선시대의 정궁이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들이 거주하였고
조선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궁의 역할을 하였다고한다.
창덕궁에 대해 찾아 올려본다.
창덕궁은 처음에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데다가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 위주로 지어졌다.
때문에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은 매우 조촐하게 지어졌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은 3칸 규모의 작은 것이었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해야겠다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면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는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때의 공사로 인정전이 5칸 규모로 재건축되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한다.
창덕궁의 편전(便殿)이며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이다.
창덕궁이 건립되던 초기에는 조계청이라고 불렀다가 세조 즉위 7년인 1461년에 선정전(宣政殿)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인정전 동쪽 광범문(廣範門)을 나서면 뒤쪽에 위치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선정전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을 함께한 건축물이다
耀輝門(요휘문)
대조전(大造殿)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다.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갱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얻은 자재로 1920년에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순종황제가 대조전의 부속 전각인 흥복헌에서 붕어했으며, 해방 후인 1985년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 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희정당(熙政堂)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면 11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전각이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의 침전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희정당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재건을 거치면서 선정전의 편전 기능을 이어 받았다.
장락문은 낙선재 정문이며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한다.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 강점기에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됐다.
정리를 하자면 과거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것이 현재는 물리상으로나 행정관리상으로나 모두 분리되었단 얘기가 된다.
위 사진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데,
순정효황후는 1966년까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까지 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영친왕과 그 아들 이구의 장례식은 각각 1970년, 2005년에 거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조선왕조의 최후를 장식한 궁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곳.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
숙장문에서 진선문 방향으로
돈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