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선생유적지(파주)외
지난 토요일 파주에 있는 황희정승묘를 찾아갔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81)
탄현면에 소재하고 있는데 묘역 주변에 자두가 빨갛게 익어 먹음직스러웠다.
묘역참배는 원모재에서 "방촌선생부조묘"를 들려서 방촌선생 묘소의 순서로
걸었다.
우선 부조묘라는뜻이 궁금했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어 계속해서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한다.
황희 정승의 묘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4개의 화창(火窓)이 투각된 장명등이 있고
봉분좌측에 묘갈(비석)이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설치되어 있다.
해설사가 무인석이라고 하는
비는 문인석이고 문인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자상인데 잘못 설명하고 있다.
설명이 이상해서 찾아보았다.
황희 정승은 1363년 고려 공민왕때 태어나서 1452년90세까지 살면서 무려 60여년의 벼슬을 했다
그의 업적은 많지만 특별히 세종에게 요즘으로 말하면 출산휴가를
건의해 실행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방촌(厖村) 황희(黃喜)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희(黃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27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으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렸다.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태종(太宗)대에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世宗)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議政府)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황희선생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역시 규모가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4개의 화창(火窓)이 투각된 장명등이 있다. 봉분좌측에 묘갈이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원모재(遠慕齋) 앞 언덕에 신도비가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으며 신숙주(申叔舟)가 짓고 안침(安琛)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방촌선생신도비각( 방촌은 황희 선생이 태어나신 고향이라고 한다. 방은 삽살개방,클방 (厖))
방촌황희선생부조묘 4대가 되면 사당에 모시지 못하지만 특별히 나라에 공을 세운 분에게 사당에서 모시는 경우를 부조묘라고 한다.
방촌황희선생부조묘
황희 선생묘소
방촌선생영정각 앞 문열고 들어서면 바로다.
황희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거처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황희선생 유적지다.
저 앞 문은 청정문이며 맞은 편이 방촌 기념관이다.
방촌 기념관
조선시대 청백리 저 아래 내 조상인 좌의정 최흥원이 있어 사진에 담아봤다.
법은 대대로 이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단번에 가벼이 고쳐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