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두대간이란
백두대간이란?
하늘로 오르는 한 길이 있으니, 이름하여 백두대간이다.
또한 그 길은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서는 길이기도 하다.
솟구치며 물을 풀어 놓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물은 온 땅을 적시며 뭇 생명을 길러낸다.
사람 또한 그 길을 오르내리며 삶을 엮어간다.
산에 등 기대고 강물에 발 적시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을 오르는 모든 길은 오름과 내림의 연속이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 할지라도 저 홀로 곧추선 게 아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깨를 겯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하나의 산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등산과 하산은 동의어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또한 크고 작은 산들로 이어지는 이 땅의 으뜸되는 산줄기이다.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도상 거리 1625㎞: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백두대간에 가장 많은 땀을 보탠 한 사람인 조석필씨의 글에서 그대로 갖다 쓴다) 이 땅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 그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금강산, 설악산, 점봉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과 같은 대부분의 명산들이 대간 위에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백두대간은,
두류산 조금 못미처서부터 동해 맨 꼭대기의 서수라에 이르는 장백정간을 추켜올리고는,
줄곧 남으로 내달리다 매봉산에서 몸을 틀어 서남쪽을 향하다 속리산을 부려 놓고는
다시 남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동안 13개의 정맥을 펼쳐 놓는다.
정맥과 정맥 사이로는 이른바 10대강을 품에 안는다.
한강 수계니 낙동강 수계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네 삶이 강줄기를 터전 삼고 산줄기를 울타리로 삼을 수밖에 없음이 이로써 분명해진다.
문화권이라는 것도 그렇다.
인위적인 행정 구역이나 산맥 개념의 추상적인 지리 공간에 의해 모듬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줄기에 의해 결정된다.
영남 지역이라 함은 새재의 이남을 말하며, 영서라 하면 대관령의 서쪽을 일컫는다.
이렇듯 우리의 산과 강은 뼈와 살의 구조를 이룬다.
산이 체(體)라면 강은 용(用)이다. 몸과 몸짓의 관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리 인식이 산경(山經)의 원리인데,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물을 가른다는 것이다.
당연히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다.
또한 이 말 속에는 산 또한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전도의 발문에서 밝힌 이 원리는 우리네 전통지리학의 핵심 원리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해 산경 즉 끓임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를 정리한 책이 <산경표>(우리 나라의 산줄기를 족보식으로 정리한 책으로 편찬자는 분명하지 않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인데, 그것의 실제 모습이 바로 1대간 1정간 13정맥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치 제 손바닥의 손금 들여다 보듯이 우리 땅의 실체를 육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산맥은 어떤가. 예를 들어 ‘마식령산맥’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지리학자나 입학 시험을 앞둔 학생들 빼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맥은 지질 구조를 바탕으로 그은 것이므로 실제 지형과는 동떨어져 있다. 아무리 그 이름을 외워봤자 실체로 다가올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아프리카의 국경선들이 네모 조각으로 모자이크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대간과 정맥은 그렇지 않다.
‘한북정맥’ 하면 확실히는 몰라도 아, 한강의 북쪽에 있겠구나, 그래서 소양호 쪽에서 흘러내리는 강줄기를 북한강이라 하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우리의 대간과 정맥은 실제로 그 등마루를 따라 걸을 때, 단 한 번도 물을 건너지 않고 온전히 밟아 나갈 수 있다. 백두산 꼭데기에서 지리산 꼭데기까지 한번도 신발을 벗지 않고 온전히 밟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간과 정맥이 다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80년대 초다.
이우형이라는 한 지도 연구가에게 인사동의 고서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산경표>가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 후, 박용수나 조석필과 같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등산 전문지인 <사람과 산>이라는 멍석을 만남으로써, 산맥이라는 남(일제)이 만들어 준 도수 맞지 않는 안경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산천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미리 밝히건대, 이 작업 또한 이러한 분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때론 남의 글에서 얻은 내용을 갖다 쓰면서도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옹색한 변명이지만 매체의 특성상 어쩔수 없음으로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다 아는 얘기지만 산경의 원리는 18세기에 집성된 조선의 지리학적 성취다.
하지만 그 뿌리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로 이어진다.
다음의 인용문은 <고려사>의 한 부분으로, 공민왕 6년(1357),
사천 소감 우필흥(于必興)이 왕에게 올리는 글의 일절이다.
“옥룡기(玉龍記)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地勢)의 본 뿌리는 수(水)요 줄기는 목(木)이라…(司天少監于必興上書言玉龍記云我國始于白頭終于智異其勢水根木幹…. 번역은 북한 사회과학원의 것임).
위의 글에서 옥룡기(玉龍記)라 함은 옥룡비기 또는 옥룡비결 등으로 불리는 도선(道詵, 827~898) 스님의 예언서를 가리킨다. 도선 스님이 누구인가. 동리산문의 선풍을 이어 옥룡산문을 연, 신라말 후삼국 격변기의 대선사이자 한국 풍수의 비조가 아니든가.
이러한 우리 땅에 대한 인식은
<택리지>로 널리 알려진 이중환(1690~1752)에 의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이것이 후대로 계승되어 신경준(1712~1781)의 <산수고(山水考)>,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大東水經)> 등 자연지리서를 낳고,
정상기(1678~1752)의 <대동지도>를 이어
김정호(미상, 1800~1864년으로 추정)의 <대동여지도>로 꽃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선 후기의 지리학적 성과가 실학이라는 당시의 실천적 학문 토양에서 집성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조선 후기의 시대 상황을 거울 삼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김정호보다 1세기나 앞선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이미 모든 산들이 개별적이 아니라 이어진 맥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똑똑히 기억해 둘 대목이다.
백두대간/
우리의 전통 지리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백두대간’은 한반도를 동과 서로 크게 갈라 놓은 산줄기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산줄기는 각각 1개의 대간(大幹)과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인식되었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 지었다.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 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초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어 왔으며, 18세기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영향을 받은 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이후 19세기에 고산자 김정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대동여지도>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지도라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 이르러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이 땅을 대륙과 이어주는 뿌리이자 줄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총 길이는 1625여km이며, 백두산과 지리산의 사이에 북쪽의 2000m급 고봉들과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품고 있다. 이 가운데 남한 구간은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약 690km에 이른다.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어 각지의 언어, 습관, 풍속 등과 부족국가의 영역을 이루었고, 삼국의 국경을 비록한 조선시대의 행정경계가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연스러운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이 땅의 지세(地勢)를 파악하고 지리를 밝히는 근본이 된다.
현재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은 199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열기로 대부분이 답사가 되어 많은 자료들이 쌓여 가고 있다. 학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간에는 1326종 식물과 희귀 야생동물들의 살고 있어서 꼭 보존해야 할 생태계의 보고라 한다. 이렇게 쌓인 자료와 조사를 바탕으로 한 여러 환경 단체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정부 부처(환경부, 건설부 등)에서도 생태의 보존과 보호에 우선적인 배려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한 상황이다. 특히 백두대간의 출발점이 백두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분단의 장벽으로 인해 북한 쪽의 구간을 답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너무도 크다.
백두대간의 역사/생활권
백두대간이 언제부터 이 땅을 이해하는 지리인식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인 기록이나 지도 등을 통해 길게는 천 여년, 짧게는 수 백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인식이 현재와 같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백두에서 지리까지"라는 큰 줄기에서는 현재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오랜 세월을 이어온 인식체계가 20세기 초 식민지로 전락하는 나라와 겨레의 운명과 함께 잊혀지고 말았다. 이 땅을 바라보는 눈과 얼도 고스란히 일본제국주의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 것이다.
해방이 된 후에도 그냥 잊혀져 있던 백두대간이 십 여 년 전부터 시작된 뜻있는 이들의 외롭고 힘든 노력으로 이제야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분들의 눈물과 지새운 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래 글은 백두대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 10세기 초 :『옥룡기』(도선)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라는 설명 등장. 『성호사설』(이익)에서 인용.
○ 1402년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의 한반도를 보면 백두대간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음. 이후 간행된 지도에는 이런 흐름이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음. (참고 자료 : 옛지도의 백두대간 )
○ 16세기 경 :『패관잡기』(어숙권)에 보면, 고려 공민왕 때 우필흥이 임금께 올리는 글(上書)중에 '우리나라 지세는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끝났다'는 내용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음.
○ 1751년 :『택리지』(이중환) 조선 산맥, 백두대맥, 백두남맥, 대간 등의 용어 사용.「산수」편에 대간과 정간 12정맥으로 볼 수 있는 내용 묘사.(참고 자료 : 『택리지』속의 백두대간.
○ 1760년 경 :『성호사설』(이익) 「천지문」 편 제목 : '백두정간' 중에 백두대간 용어 사용
○ 1770년 :「여지고」(신경준) 『동국문헌비고』 중의 한편으로 산경표의 뿌리가 됨.
○ 1800년 경 : 『산경표』:「여지고」를 기본으로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을 족보식으로 체계, 도표화함
○ 1861년 : 「대동여지도」(김정호) 백두대간이 지도상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음. (참고 자료 : 이우형 복간본 <대동여지도> 원도, 영인자료. 전도 축소본)
○ 1899년 :『대한지지』(현채) 백두산은 전국산의 조종으로 지리산에서 끝나며, 정간으로 표현.
○ 1908년 :『대한신지지』(장지연) 백두산맥이라 표현
○ 1913년 :『산경표』(조선광문회) 간행. 조선광문회는 '빼았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 구래(舊來)의 문헌·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는데 지리서 중 『산경표』를 세 번째로 간행함.(참고 자료 : 영인자료)
○ 1980년 :『산경표』(조선광문회)가 이우형의 손에 들어와 <대동여지도>와의 대조 등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됨.
○ 1986년 : 언론매체로는 처음로 『스포츠레저』에 이우형의 권유에 의해 백두대간이란 용어 등장함. 『조선일보』(07/24)에 이우형의 「국내 산맥이름 일제가 바꾸었다」는 기사 실림.
○ 1988년 : 한국대학산악연맹 학술지 『엑셀시오』에 백두대간 ( 1.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박기성. 2. 백두대간을 가다 : 종주기 - 편집실)을 특집으로 다룸.
○ 1990년 :『산경표』조선광문회본 영인.(박용수 해설. 푸른산) 이 영인본은 『산경표』의 본 모습을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 (참고 자료 : 산경표를 다시 펴내면서) 월간 『사람과 산』은 이 때부터 백두대간과 정맥의 자료와 종주기 등을 꾸준히 기사화하여 백두대간을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함.
○ 1993년 :『산경표를 위하여』(조석필. 산악문화)가 자비로 출판되었다가 여러 사람들의 성원으로 호남정맥 종주보고서와 함게 엮어 단행본으로 출간됨. 현재 절판되었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태백산맥은 없다』에 보완 수정되어 실렸음. <대동여지전도>의 발문에 실려 있는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山自分水嶺)'는 원리를 산악인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 설명하였음. 이후 대부분의 백두대간 관련 이해와 설명 방식은 이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백두대간과 정맥을 종주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준칙이 됨.(참고 자료 : 『산경표를 위하여』)
○ 1997년 :『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 사람과 산)는 『산경표』와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책으로 현재 백두대간과 관련된 기초 자료와 원리 이해의 뿌리는 대부분 이 책과『산경표를 위하여』에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함. 책말미에 『산경표』(조선광문회본 영인)를 싣고 있음.(참고 자료 : 『태백산맥은 없다』소개)
○ 2000년 :『한글 산경표』(현진상. 풀빛)는 한글 세대를 위하여 『산경표』를 한글화한 최초의 책임.『산경표』의 원전으로 보이는「여지고」등 여러 자료와의 꼼꼼한 대조를 통해 많은 부분의 오류를 바로 잡았음. 그리고 『산경표』의 저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문헌 고찰을 통하여 『산경표』의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 아니라 신경준의 「여지고」를 기본으로 1800년대 초에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추정함.(참고 자료 : 『한글 산경표』소개)
풍수로 본 백두대간의 역사
수계 파악의 근간으로 산맥 접근
이와 같은 산경원리 개념이 고래로 전하여진 풍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풍수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의 풍수는 풍수라는 표기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개념의 사상으로 변모되어 있다. 한반도의 지세는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뻗었다는 도선의 풍수설, 즉 도선비기(道詵秘記) 이론은 지형지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고려의 정치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수세기 동안 이 나라 지리학을 지배했다.
공익을 우선한 이 설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즉 길지와 명당의 소유욕으로 특권계급의 영욕의 도구로 타락해 버렸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대변하는 지리사상으로도 정착해 자연히 후기 조선시대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산경은 전 국토를 대상으로 자연지리에 바탕을 두고 지형지세를 과학적으로 정립했다는 의미에서 실학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오악, 십이종산, 외명산, 사명산 등으로 알려져 온 명산들이 있으나 이 가운데 팔도 산맥의 종산이 된다는 십이종산(삼각, 백두, 원, 낭림, 두류, 금강, 오대, 태백, 속리, 장안, 지리)의 산들이 간·정맥의 선상에 있을 뿐 실제로 산경의 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지형지세로 이루어진 수분기(水分岐) 중심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산맥, 즉 산경을 정리하면,
1) 대간, 정맥의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비롯된다. 이 땅의 근골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으로서 모든 수계를 크게 동서로 양분한다.
2)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 쳐 나온 이차적인 산줄기로서 큰 강의 유역능선, 즉 분수능선이다. 따라서 정맥은 산줄기의 높이, 규모, 또는 명산, 종산, 진산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낮고 미약한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이라도 한강의 남쪽 유역을 가르는 능선이므로 중요한 한남정맥의 줄기가 되는 것이다. 정맥들로 형성된 강은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다.
3) 기맥은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대간과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서 내(川)를 이루는 분수릉이다.
이와 같은 산경의 개념은 현대의 산맥개념과는 달리 모든 산줄기는 강, 즉 물줄기를 건너뛰어 연결될 수 없고, 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하다. 따라서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그 끝남은 강 하구의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산경은 수계를 경계하는 능선이므로 전국토의 지세지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수계 중심으로 발달된 이 땅의 도시형성과 관계되는 유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분하여 골(谷)까지의 수계 파악도 쉽게 하여 당시 해안에서 내륙 깊은 곳까지 조운(漕運) 영역도 쉽게 가름할 수 있었다.
생활권의 자연스런 분계
하나의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 친 기맥으로 이 땅을 가름한 산경은 이 땅의 모든 생활권역의 자연스런 분계를 이루고 있다.현재 각 지방 또는 지역의 경계를 두고 우리는 크게 북부, 중부, 남부 지방으로 나누고, 영남, 호남, 영동 지방등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다시 나누어 안동, 단양, 남원 등의 지방으로도 이야기하며, 해안에서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지방으로도 구분하고 있다. 이들 지방들의 경계를 편의상 행정경계를 기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산경도>에서 볼 때 북부는 해서정맥 북부, 중부와 남부는 백두대간의 속리산 구간과 한남금북정백~금북정백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그 경계가 대별되어 오히려 자연, 인문, 식생, 기후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더 타당하다. 해안지방에서도 대체로 내륙 어디까지를 경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 명확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산줄기 개념으로 볼 때 그 답을 얻을 수 있으며, 여타 지방의 경계도 <산경도>에서 쉽게 가름할 수 있다.
배산임수의 취락형성이나 발달, 그리고 식생활과 주거양식의 구분도 산경의 선과 일치하고 있다.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음식문화도 다르다. 특히 황세기젓 문화권, 새우젓 문화권, 멸치젓 문화권으로 나누어 보면 재미있는데, 이런 문화권의 형성도 <산경도>로 쉽게 가름되는 것이다. 주거의 양식을 예로 들어 보자. 남해안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반드시 덧문이 있지만 내륙의 집에는 없다. 그 분포가 어떤 선으로 그어지느냐 하면 바로 호남정맥의 남쪽과 낙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선과 일치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언어권의 분포도 우리말의 방언을 도별로 대별하지만 같은 도내에서도 크게 다른 말씨가 있다. 경상도 말은 강원도 속초지방에서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하며, 같은 전라남도이지만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해서 서쪽의 광주 말과 동쪽의 섬진강 유역인 곡성, 구례의 말은 전혀 다르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 말과 이웃한 용인, 이천의 말이 다른데, 그 사이에는 한남정맥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일일이 이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언어권은 사람들의 습성과도 연결되며, 풍속, 놀이, 혼례, 장법 등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도 산경의 산줄기로 쉽게 알 수 있고, 절기와 식생의 분포, 꽃의 개화일도 정맥의 선과 관계가 깊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는 행정단위 중심에서 점차 지역특성이나 재해특성, 또는 생활권 등을 고려해 53개 국지예보로 바뀌었는데, 이 예보구역이 산경을 가름한 정맥과 그로부터 갈라져 분할하고 잇는 기맥들이 이루어 놓은 하나 하나의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영토의 분활 변천이 이들 산경의 정맥들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역사지리 전반에 걸쳐 산경은 근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다. 여기에 단절의 한 시기로 '진정한 우리만의 것'을 이어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어디에나 물이 있어 물통은 없어도 표주박만 있으면 되었듯이 물에 관한 한 참으로 축복받은 우리들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어린이들은 멋과 가락, 상상과 여유인 산을 잃어버리고 로보트부터 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땅, 우리 산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모태이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경원리, 즉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알맹이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인식을 옛 선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산을 아끼고 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선조들이 인식했던 산경의 원리를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에서 우리 땅에 대한 보다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있기를 빈다.
이 글은 『산경표』를 발굴하여 이 땅에 다시 백두대간의 존재를 알린 이우형 선생님이「월간 산」(1993년 6월)에 기고한 글의 전문입니다. 당시 월간 「산」은 백두대간을 특집으로 실었는데, 그 내용은 '항공사진, 정의, 종주요령, 종주사례'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중 '(백두대간의) 정의'에 실린 것입니다. 항공사진은 '백두대간 이미지'메뉴에 '하늘과 땅에서 본 백두대간'에 실려 있습니다
<안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