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좋은 날
정약용의 하피첩( 霞帔帖) 본문
▶요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2005년 수원 어느 모텔 주인이 건물을 고치려고
실내에 있던 파지(破紙)들을 마당에 내놓았다.
폐품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자에 눈이 갔다.
그는 책자와 파지를 맞바꿨다. 그러곤 혹시나 싶어 KBS '진품명품'에 내놓았다.
감정위원인 고미술 전문가 김영복은 책을 본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었다. '진품명품'은 감정가 1억원을 매겼다.
▶다산 '하피첩'이 그제 서울옥션 경매에서 7억5000만원을 받고 국립민속박물관에 팔렸다고 한다.
이 유물은 개인 수집가 손에 들어갔다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건 때 압류되는 운명에 처했다.
'하피'는 옛날 예복의 하나다. '붉은 노을빛 치마'란 뜻이 담겼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하피에 관심이 생겼다.
다산 정약용이 아내의 치마폭을 잘라서 곱게 마름질하고
그곳에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쓰서 보냈던
것들을 모은 편지집이다.
다산 정약용은 15세에 결혼했다.
부인 홍혜완(洪惠婉)은 명문가 규수로서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간 지 7년이 되던 1807년 겨울. 이 해는 결혼 30년이 되는 해였다.
홍씨부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남편을 그리며 쓴 시와 함께
자신이 시집올 때 입고와 장롱에 보관해 온 빛바랜 하피(霞帔. 붉은 색 치마)를 강진의 남편에게 부쳤다.
다산은 이 빛바랜 비단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나누어 학연(學淵), 학유(學遊) 두 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 주었다.
집안의 경제적 운영에 대한 조언과 인간답게 사는 훈계의 내용을 담아
아들들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랐다.
근면을 토대로 한 양잠.양어.축산, 상품작물의 재배 등 경제적 생산을 함께하는
선비다움도 강조하였다. 이 것을 모아 엮은 것이 하피첩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치마 한자락에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자식에 대한 당부의 글을
종신토록 가슴속에 새겨두라는 애끓는 마음과 함께 담았다
病妻寄敝裙 병든 아내 낡은 치마 보내서,
千里託心素 천 리 먼 길 애틋함을 부쳤네.
歲久紅已褪 오랜 세월 붉은 빛이 바래니,
悵然念衰暮 만년에 서글픔 가눌 수 없네.
裁成小書帖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이루어,
聯寫戒字句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庶幾念二親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終身鐫肺腑 종신토록 가슴 깊이 새기려무나.
정약용이 아들들에 남긴글 중에 몇가지를 찾아 옮겨본다.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수 있는 방법이 있기에 이제 너희에게 주노니.........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다시 말해 부지런하고 검소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도 속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가지 괜찮은 것은 바로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하찮은 음식이라도 맛있다고 생각하고 입과 입술을 속여
주린 배고픔을 가실 수 있다면 이 또한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다."
"자고로 선비의 마음가짐이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아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도덕적 용기인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수 있다"
또한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가르치고 있다.
施惠不念 受恩不忘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마음속에 두지 말고, 남에게서 받은 은혜는 잊지말라.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세가지가 있다.
첫째, 동용모(動容貌) 다른 사람이 얼굴표정을 맑고 밝게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둘째, 출사기(出辭氣) 찡그린 얼굴을 멀리하고 불손한 말을 삼가고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정안색(正顔色) 안색 또한 어둡지 아니하고 밝게 가지려 힘써야 한다.
한편 그로부터 3년 뒤 다산은 시집 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에 한 해 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 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가 그것이다.
유배 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이렇게 기막힌 사연을 담은 정약용의 하피첩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사연이 신문에 실려있어서 찾아 옮겨 봤다.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 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 홍 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옳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 뜻도 있기 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 것이다.
孝弟爲行仁之本。然愛其父母,友其晜弟者,世多有之,
不足爲敦行,唯伯叔父,視昆弟之子猶己子,昆弟之子,
視伯叔父猶親父,從父昆弟,相愛如同胞,使他人
서사
余在耽 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讔也。
嘉慶庚午首秋, 書于茶山東菴
籜翁 萚낙엽탁
내가 탐진(耽津)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 시집올 때 입었던 훈염(纁袡, 결혼예복)이다. 홍색은 바래고 황색도 옅어져서, 서첩으로 만들기에 꼭 맞다. 이에 재단하여작은 첩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붓 가는 대로 써서 두 아들에게 물려준다. 앞날에 이 글을 보고 감회가 일어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을 접하면, 무럭무럭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한 것은 ‘붉은 치마’라는 말을 숨기고 바꾼 것이다.
가경(嘉慶) 경오년(1810) 7월[首秋] 다산(茶山)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탁옹(籜翁)
집안의 화목
孝弟爲行仁之本。然愛其父母, 友其晜弟者, 世多有之, 不足爲敦行。唯伯叔父視昆弟之子猶己子, 昆弟之子視伯叔父猶親父, 從父昆弟相愛如同胞, 使他人來館者閱日踰旬, 終不知孰爲孰父孰爲孰子, 方纔是拂家氣象
효제(孝弟)는 인(仁)을 실행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간에 우애 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서, 효제가 돈독한 행실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오직 백부와 숙부는 형제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고, 형제의 자식이 백부와 숙부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사촌 형제를 친형제처럼 서로 사랑하여 혹 어떤 사람이 와서 열흘이 지나도 누가 누구의 아버지이고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끝내 알지 못하게 할 정도가 돼야, 겨우 번창하는 가문의 기상이라고 할 수 있다.
人家方富貴榮暢之時, 骨肉且方依附藉賴, 雖有小怨, 含之不泄, 所以彼此不失和氣。若貧困兩甚, 卽斗粟尺布, 辨諍紛起, 惡言相加, 胥侮胥慢, 轉輾層激, 終爲仇敵
어떤 집이 한창 부귀를 누릴 때는, 골육들도 따르고 의지하며 조그만 원한이 있더라도 참고 내색하지 않아 피차 화목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만약 양쪽 다 빈곤이 심하게 된 경우, 좁쌀 한말이나 베 한 자도 따지고 다투어 분쟁이 일어나 서로 나쁜 말을 하고 서로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결국 원수처럼 된다.
當此之時, 若無一個恢弘男子感動得一個婉慧婦人, 廓開山藪之量, 昭回雲日之光, 守雌致柔, 如嬰孩·如無腸公·如無骨蟲·如葛天民·如入定僧, 彼投以石, 我報以瓊, 彼設以刀劒, 我待以酏醴。
未有不睊睊悁悁, 勃豀鏖譟, 翻門覆戶而後已者
이러한 때에 마음이 무한히 너그러운 한 남자가 슬기로운 자기 부인을 감동으로 설득하고, 산의 숲 같은 아량을 활짝 열고 태양 같은 빛을 다시 비추며, 유순한 태도로 부드러움을 다하여 마치 어린아이처럼, 속이 없는 게처럼, 뼈가 없는 벌레처럼, 순수한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처럼, 선정(禪定)에 든 스님처럼 저쪽이 돌을 던지면 나는 옥구슬로 화답하고 저쪽에서 칼을 들면 나는 단술로 대접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눈을 흘기고 성을 내서 옥신각신 다투다가 집안을 망치고 나서야 그만 두게 될 것이다.
汝等須知此義, 日取小學外篇嘉言善行, 寸寸摹擬, 拳拳服膺也。久則感悅, 自成雍睦。 雖或不幸而不格, 親戚鄕黨, 自有公論, 不至混同驅歸於夷獠蠻貉之俗, 而門戶得以保全矣。
너희는 모름지기 이 의미를 깨달아 『소학(小學)』 외편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날마다 읽고 구절마다 본받아 깊이 명심해라. 오래 이렇게 하면 모두 감동하고 기뻐하여 저절로 화목해 질 것이다. 혹 불행히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친척과 향당(鄕黨)에 자연히 공론이 서서 함께 야만의 습속으로 휩싸여 들어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아, 가문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지 마라
中國文明成俗, 雖窮鄕遐陬, 不害其成聖成賢。我邦不然, 離都門數十里, 已是鴻荒世界, 矧遐遠哉! 凡士大夫家法, 方翺翔雲路, 則亟宜僦屋山阿, 不失處士之本色, 若仕宦墜絶, 則亟宜託栖京輦, 不落文華之眼目。
중국은 문명(文明)이 훌륭한 풍속을 이루어서 궁벽한 시골이나먼 변방에서도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데 장애가 없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도성(都城)에서 수십 리만 떨어져도 이미 홍황세계(鴻荒世界, 야만지역)인데 하물며 먼 지방임에랴! 무릇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산기슭에 거처를 얻어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해서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吾今名在罪籍, 使汝曹姑遯田廬, 至於日後之計, 唯王城十里之內, 可以爰處。 若家力衰落, 不能深入, 須蹔止近郊, 蒔果種菜, 以圖生活, 待資賄稍贍, 便入市朝之中, 未爲晚也
내가 지금 유배를 당한 처지라 너희로 하여금 당분간 농촌에 물러나 살게 했지만, 훗날의 계획은 오직 도성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경제력이 부족하여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으면, 모름지기 근교에 잠시 머물며 과일을 재배하고 채소를 가꾸어 생활하다가 재산이 조금 넉넉해지면, 곧 시내로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禍福之理, 古人疑之久矣。 忠孝者未必免禍, 淫逸者未必薄福。 然爲善是受福之道, 君子強爲善而已
화(禍)와 복(福)의 이치는 옛 사람도 의심한 지 오래 되었다. 충신과 효자가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며, 악하고 방종한 자가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므로, 군자는 힘써 선을 행할 뿐이다.
自古禍家餘生, 必高翔遠遯, 唯恐入山之不深究也, 爲麕爲兔焉而已。大凡富貴薰濃之家, 菑難然眉, 而晏然無愁, 落拓擯棄之族, 太平洋溢, 而常云有憂。蓋其陰厓幽谷, 不見陽氣, 所與游者, 皆廢枳嗸怨之類。故所聞皆迂誕辟陋之譚, 玆所以長往而弗顧也。
예로부터 화를 당한 집의 자손은 반드시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나 오직 숨은 산이 깊숙하지 않은 것만 걱정했는데, 노루나 토끼처럼 되었을 뿐이다. 대저 부귀에 젖은 집안의 자손은 재난이 코앞에 닥쳐도 태평스럽게 걱정이 없고,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안의 자손은 태평스러울 때도 늘 걱정이 있다. 대개 그늘진 절벽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따뜻한 기운을 보지 못하고 어울려 노는 사람은 대부분 앞날이 막히고 원망이 많은 부류이다. 그래서 듣는 바가 모두 황탄하고 궁벽한 이야기여서 이것이 한 번 은거한 후에는 뒤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까닭이다.
誠願汝等常令心氣和平, 不異當路之人。 及至兒孫之世, 得存心科擧, 留神經濟。 天理循環, 不必一踣而不起也。若不勝一朝之忿, 勃然流徙者, 終於甿隷而已矣。
진실로 바라건대, 너희는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다름없이항상 마음과 기상을 화평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아들과 손자의 세대에 이르면, 과거(科擧)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경세에도 뜻을둘 수 있다. 천리(天理)는 순환하니, 한 번 넘어졌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은 없다.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끈하여 떠나 버리는 사람은, 미천한 무지렁이로 생을 마감할 뿐이다.
孝弟爲行仁之本。然愛其父母。友其晜弟者。世多有之。不足爲敦行。唯伯叔父視昆弟之子猶己子。昆弟之子視伯叔父猶親父。從父昆弟相愛如281_388b 同胞。使他人來館者。閱日踰旬。終不知孰爲孰父。孰爲孰子。方纔是拂家氣象。人家方富貴榮暢之時。骨肉且方依附藉賴。雖有小怨。含之不泄。所以彼此不失和氣。若貧困兩甚。卽斗粟尺布。辨諍紛起。惡言相加。胥侮胥慢。轉輾層激。終爲仇敵。當此之時。若無一個恢弘男子。感動得一個婉慧婦人。廓開山藪之量。昭回雲日之光。守雌致柔。如嬰孩如無腸公如無骨蟲如葛天民如入定僧。彼投以石。我報以瓊。彼設以刀劍。我待以酏醴。則未有不睊䁚편001悁悁。勃谿鏖譟。翻門覆戶而後已者。汝等須知此義。日取小學外篇嘉言善行。寸寸摹擬。拳拳服膺也。久則感悅自成雍睦。雖或不幸而不格。親戚鄕黨。自有公論。不至混同驅歸於夷獠蠻貉之俗。而門戶得以保全矣。
中國文明成俗。雖窮鄕遐陬。不害其成聖成賢。我邦不然。離都門數十里。已是鴻荒世界。矧遐遠哉。凡士大夫家法。方翺翔雲路。則亟宜僦屋山阿。不失處士之本色。若仕宦墜絶。則亟宜託栖京輦。不落文華之眼目。吾今281_388c 名在罪籍。使汝曹姑遯田廬。至於日後之計。唯王城十里之內。可以爰處。若家力衰落。不能深入。須暫止近郊。蒔果種菜。以圖生活。待資賄稍贍。便入市朝之中。未爲晚也。禍福之理。古人疑之久矣。忠孝者未必免禍。淫逸者未必薄福。然爲善是受福之道。君子強爲善而已。自古禍家餘生。必高翔遠遯。唯恐入山之不深。究也爲麕爲兔焉而已。大凡富貴薰濃之家。菑難然眉。而晏然無愁。落拓擯棄之族。太平洋溢。而常云有憂。蓋其陰厓幽谷。不見陽氣。所與游者皆廢枳嗸怨之類。故所聞皆迂誕辟陋之譚。玆所以長往而弗顧也。誠願汝等常令心氣和平。不異當路之人。及至兒孫之世。得存心科擧。留神經濟。天理循環。不必一踣而不起也。若不勝一朝之忿。勃然流徙者。終於甿隷而已矣。嘉慶庚午首秋。書于茶山東庵。
효제(孝弟)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그 부모를 사랑하고 그 형제끼리 우애(友愛)하는 사람쯤이야 세상에 많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는 도타운 행실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백부(伯父)ㆍ숙부(叔父)로서 형제의 아들을 자기 아들과 같이 여기고, 형제의 아들들이 백부ㆍ숙부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사촌형제끼리 친형제처럼 서로 사랑하여, 집에 찾아온 다른 사람이 하루를 보내고 열흘을 넘겨도 끝내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며, 누가 누구의 아들이 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만이, 사대부(士大夫)의 집을 부지(扶持)해 갈 수 있는 기상(氣象)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집이 한창 부귀 영창(富貴榮暢)할 때에는 골육(骨肉)이 또한 서로 의지하고 붙좇아 도우며 살기 때문에 약간의 원망이 있더라도 참고 발설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차간에 화기(和氣)를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빈곤이 서로 심하면 한두 말의 곡식이나 몇 자의 포목(布木)을 가지고도 따지고 다투면서 악언(惡言)도 서로 하게 되는데, 이렇게 서로 업신여기며 다투는 것이 점점 더해지면 끝내는 원수처럼 되고 만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어떤 도량이 넓은 남자가 아리땁고 지혜로운 부인(婦人)을 감동시켜 산수(山藪) 같은 도량을 넓혀 주고 태양처럼 밝은 마음을 갖게 하여 여자의 도리를 지켜 어린 아이처럼 창자 없는 것처럼 뼈없는 벌레처럼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처럼 입정(入定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정(禪定)에 들어감)한 승려처럼 하여, 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이쪽에서는 옥돌로 보답하고 저쪽에서 칼을 가지고 나오면 이쪽에서는 단술로 대접해 주게 하지 않는다면, 서로 눈을 흘겨보며 성내고 다투다가 죽이기까지 하는 등 결국 집안을 망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반드시 이러한 뜻을 알아서 날마다 《소학(小學)》 외편(外篇)의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을 읽어 하나하나 본받고 가슴 깊이 정성껏 간직하여 잊지 말고 잘 실천해 가도록 하라. 그렇게 오래 하다보면 모두 감동하고 기뻐해서 저절로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록 혹 불행히 감동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척과 향당(鄕黨)에 저절로 공론(公論)이 있을 것이니 다함께 오랑캐 풍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되어 문호(門戶)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中國)은 문명(文明)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賢人)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都城)의 문(門)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太古)의 원시 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 먼 외딴 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무릇 사대부(士大夫)의 가법(家法)은 벼슬길에 나갔을 때에는 빨리 높직한 산언덕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하고 만약 벼슬에서 떨어지게 되면 빨리 서울에 의탁해 살 자리를 정하여 문화(文華)의 안목(眼目)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들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화(禍)와 복(福)의 이치에 대하여는 옛날 사람들도 의심해 온 지 오래되었다. 충(忠)과 효(孝)를 행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음란하고 방탕한 자라 하여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善)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도(道)가 되므로 군자(君子)는 부지런히 선을 할 뿐이다.
옛날부터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들은 반드시 놀란 새가 높이 날고 놀란 짐승이 멀리 도망하듯이 도망하여 더 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 노루나 토끼처럼 되어버리고 말 뿐이다.
대체로 부귀(富貴)한 집안의 자식들은 재난이 화급한데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반면에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의 가족들은 태평한 세상인데도 언제나 걱정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늘진 벼랑이나 깊숙한 골짜기에 살다보니 햇볕을 보지 못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가 버림받고 벼슬길이 막혀 원망하고 지내는 부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라고는 모두 오활(迂闊)하고 허탄(虛誕)하고 편벽되고 비루한 이야기들뿐이니 이것이 바로 영원히 가버리고 돌아보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져 당로(當路)한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그리하여 아들이나 손자의 세대에 가서는 과거(科擧)에도 마음을 두고 경제(經濟)에도 정신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 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하루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 버리는 사람은 천한 무지렁이로 끝나고 말 뿐이다. 가경 경오년 초가을에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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