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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좋은 날
제3영 危巖展流 높은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 본문
危巖展流 (높은 바위에 펼쳐 흐르는 물)
溪流漱石來
一石通全壑
匹練展中間
傾崖天所削
시냇물 돌을 씻어 흘러 내리고
한 줄기 바위 온통 골짜기에 깔렸는데
한필의 비단인가 날리는 폭포 그 가운데 펼쳤어라
멋있게 기울어진 낭떠러지 하늘이 만든거라네.
*五曲流아래 바위 위에 흘러 떨어지는 폭포를 노래함.
내가 찾은 소쇄원 오곡류는 폭포라고 하기엔 물이 너무
적었다. 옛날 황진이가 서경덕을 흠모하며 썻다는
시조 한수를 적으며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감상해 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물이 있을쏘나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도다.
황진이 말이 나와서 한번 읽고 가면서...
[역사 속의 라이벌] 황진이 vs 허난설헌 -황진이/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사랑의 시인’- -허난설헌/ 여인의 한과 설움 토해낸 ‘고독의 시인’-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쌍벽을 이룬다. 두 시인 모두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판이하게 다른 환경과 삶의 행로를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세계는 독자성을 지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황진이는 남성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읊었고,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한과 설움을 토해 냈다. 허난설헌은 1563년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이 아버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동생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데 비해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결혼이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다.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성에 안 찼는지 바람을 자주 피웠다. 벼슬길에 나간 뒤로는 바람기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와 불화까지 겹쳤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난설헌은 뒤뜰 초당 한켠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동경해 마지 않는 생활을 글로 옮겼다.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네./저 배야 기슭으로는 들지 마라./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겠다.” 남편의 외도로 서러워진 허난설헌의 마음을 그나마 달래주던 건 아이들. 허난설헌은 강보에 싸인 그 아이들마저 하나하나 저승사자 품에 안겨줬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은 눈물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만큼 한스럽다. “작년에 딸을 잃고/올해는 아들을 잃었네./슬프디 슬프게 땅에 묻으니/두 무덤이 마주 서 있네/백양나무 숲에서는 쓸쓸한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서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네./지전으로 너의 혼을 불러/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나는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밤마다 서로 같이 노는 것을/내 비록 뱃속에 또 한 아이 있지만 어찌 가히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하염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고/피눈물 흘리며 슬픈 소리 삼킨다.” 불행은 허난설헌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정이 당쟁에 휘말려 풍비박산 났다. 오빠 허봉은 함경북도 갑산으로, 동생 허균은 남쪽으로 귀 양을 갔다. 5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곧바로 과음과 화병이 겹쳐 폐병으로 죽어간 허봉을 귀양지로 떠나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강물은 가을 되어 잔잔하고/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서릿바람에 기러기 울고 가니/차마차마 떠나지 못하네.” 황진이는 허난설헌과 달리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에게 사랑을 쏟아 부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 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피리 부는 코끝 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도려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오른님 오시는 밤이거든 구비구비 펼치리라.” 기다림의 극치를 노래하고 있다. 길고도 긴 겨울밤에 잠까지 설쳐 가며 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애틋하기 그지없다. 황진이는 뭇사내들을 시험하는 쪽으로 애정 행각을 넓혔다. 그의 미모와 자태, 재능에 내로라하던 사대부나 문사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송도 근처 깊은 산속 암자에 생불이라 일컫는 거사가 살았다. 사 람들은 그를 지족선사(知足禪師)라 불렀다. 하지만 30년 동안 수도한 그의 법력도 황진이 앞에선 맥을 못췄다. 황진이의 유혹에 그는 결국 파계를 하고 말았다. 왕족이던 벽계수도 같은 꼴을 당했다. 송도에 와서 자신의 의젓함을 뽐내던 그는 황진이를 보고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시 한 수를 읊조렸고, 벽계수는 밝은 달밤에 낭랑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 려워라/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말대로 벽계수는 송도에 머물며 짙은 사랑을 맛봤다. 황진이 의 자신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학자인 화담 서경덕을 찾아 나섰다. 화담은 황진이의 온갖 교태와 아양에 그저 웃음만 지었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 三絶)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송도 3절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로 자연에 애착을 가졌다. 여기저기 풍광이 뛰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박연폭포에 대한 시상은 여장부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박연폭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묘사가 사실적이기도 하다. “한 가닥 긴 물구비가 골짜기 틈에서 뿜어져나와/흉흉한 물결은 백 길의 용늪을 이루고/거꾸로 쏟아져내리는 샘이 구름인가 싶다./성난 폭포 비꼈으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우박과 천둥소리 마을까지 넘치 고/구슬방아에서 옥이 부서져 허공에 치솟는다./구경꾼들아 말하지 마오. 여산의 승경이 좋다고./알거라, 해동의 제일은 이 천마산임을.” 황진이가 명사들과 사랑을 탐닉하며 자연을 노래한 데 비해 허난설 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렸다. 자신의 불행을 이타심 배양에 활용한 셈이다. 동병상린은 〈빈녀음(貧女吟)〉에 잘 드러나 있다. “손에 가위를 잡느라/추운 밤 열 손가락이 어네/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지으면서/해가 거듭 돌아와도 혼자만 지내네.”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작중 인물은 허난설헌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붉은 비단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꿈 깨보니 비단이불의 한켠이 비었네./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뜰 앞에 우수수 서풍에 오동 잎 지네.”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서일까.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뭇남성을 사랑하고 울렸던 황진이도 30대 중반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사랑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주야로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인걸도 물과 같아 다시 오지 아니 하더이다.” 사람도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인생살이를 황진이 역시 40도 채 안 된 나이에 마감했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드는 의문이다. 황진이와 허난설헌, 두 여인 의 생애와 시세계는 이같은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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