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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

산사

運善최명길 2016. 12. 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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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이달

山寺 李達

 

절은 흰 구름 속에 있고

중은 흰 구름 쓸지 않네

손님 오자 문이 비로소 열리고

골짜기마다 송화 가루 날리네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노

 

 

절이 구름에 둘러 쌓여 있는데,

스님은 그 구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쓸어내지 않는다.

오래도록 열리지 않던 절집 문은 나그네의 방문으로 슬며시 열리고

문이 열리자 구름이 쏠려나가면서 드러난 골짜기마다 송화 가루가 날린다.

 

이달 (李達 1539~1612)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이달의 제자 허균(許筠)이 이달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이달을 이첨의 후손으로 보아 신평이씨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달은 이석근(李碩根)-이수함으로 이어지는 홍주이씨이고 조선 후기 『신평이씨족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허균이 자신의 스승인 이달의 가계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지만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기도 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한편 잠시 동안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의 한 여관에 얹혀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달의 시는 신분 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 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맛깔나게 사용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만큼 그의 오언절구는 유명했다.

한편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청신아려). 그 가운데에 높은 경지에 오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이수광(李睟光)이 쓴 『서담집』의 서문(序文)만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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