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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 황진이) 본문
소세양과 황진이가 한달을 함께 살아보자고해서
기간이 지나 헤어지게 되면서 황진이가
아쉬운마음을 아래와 같이 시로 썼다.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황진이黃眞伊
월하오동진月下梧桐盡하고
상중야국황霜中野菊黃이라
누고천일척樓高天一尺인데
인취주천상人醉酒千觴이라
유수화금랭流水和琴冷하고
매화입적향梅花入笛香이라
명조상별후明朝相別後하면
정여벽파장情與碧波長이라
소세양 판서와 이별하며
달빛 아래 오동잎 다 지고
서리 속에 들국화 누렇다.
누각은 높아 하늘과 한 척인데
사람은 취하여도 술은 천 잔이다.
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에 어울려 차고
매화는 피리 소리에 들어 향기롭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나면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과 더불어 끝이 없으리.
소세양은 이에대한 화답으로
달빛 아래 소나무만이 푸르르고
눈에 덮인 한 포기 꽃들은 고개를 떨구었구나
내일 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 되어 나의 몸을 짓누르리
이 즉흥시를 남겼다고한다.
소세양(蘇世讓 1486년 ~ 156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풍류시인으로 전라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7세에 시를 지었고 18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며
2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라도 관찰사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다.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는 조선 최고의 기녀이자 시인으로
개성에서 몰락한 양반가문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기생이 되었고 서화에 능했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
황진이는 서경덕·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로도 불렸다.
또한 황진이는 이매창·김부용과 더불어 조선 3대 기녀라고 했다.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최고의 기녀 황진이의 사랑은
조선 최고의 로맨스로 전해지고 있다.
소세양은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듣건대 개성에 절색 진이가 있다 하나,
나 같으면 30일을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소세양은 황진이를 찾아 개성으로 가서 30일 동안 뜨거운 계약동거를 했다.
황진이는 30일을 함께했던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남루에 올라가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明朝相別後 情與碧波長)’라고 시조를 읊었다.
소세양은 탄식하며 ‘다시 머무르니
내가 그 사람이 아니다(吾其非人哉 爲之更留)’라고 말하고
황진이 곁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황진이(1520?-1560?,생몰연대 추정,개성)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반하였다. 둘은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은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해의 일화이다.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황진이가 소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슬프게 곡을 하였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에서 三十년동안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였다. 지족선사는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를 시험하여 보려고지족암을 찾아갔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늘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까 보냐.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보고 두 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붙이게 되니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를 하게 되니 지금가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다
「청산리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서 몇 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출처에 있어서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때에 왕족중에서 벽계수 이은원이 있었다. 그는 황진이 소문을 듣고, 만일 내가 그 계집을 본다면 침혹은 커녕 천하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고 장담을 하였었다.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는 그가 얼마나 고결한가 한번 시험에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만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은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이는 단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히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여잡고 위에 적은 노래를 한곡조 부르니 이씨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니 스스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져서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고 있는데, 담 밖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자니 분명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겠다 싶어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이사종이 함께 살자며 설득하자 황진이는 망설이다가 40세가 되는 6년 동안만이라고 다짐을 받았다. 6년이 지나자 이사종은 그녀를 붙잡았으나 황진이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송도로 돌아갔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사십 내외에 불행히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천하의 호협 시인 백호 임제 같은 이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을 지어가지고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제를 지내 주었다가 그것이 언관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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